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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와 낙동강에 대한 설명

금관가야와 낙동강에 대한 설명

금관가야와 낙동강에 대한 설명
금관가야와 낙동강에 대한 설명

금관가야와 낙동강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요즘 최근에 금관가야 건축물을 복원하는 모습들입니다. 금관가야는 사실 여러분 잘 모르시죠?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만, 제가 조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지금의 김해입니다. 지금의 김해시와 부산 서쪽을 걸쳐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금관가야는 철 생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철제품을 제작하고,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김해 또는 부산 동래 쪽에 답사를 가보시면 또는 박물관을 가보시면 철과 관련되는 제품들이 상당히 많이 출토가 되어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근거로 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낙동강 하구는 여러분 잘 아시죠? 낙동강 삼각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여러 학자들이 낙동강 하구를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였던 나일강 하류의 델타 지역에 비유를 해서 고(古) 김해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관가야는 고(古) 김해만을 기반으로 해서 성장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고, 금관가야는 낙동강을 축으로 해서 발전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게 당시 금관가야 시대의 한반도 남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신라, 백제, 가야. 가야 안에는 금관가야가 있고 대가야가 있고, 성산, 아라, 고령, 소가야 이렇게 해서 여섯 개 가야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여섯 개 가야

여섯 개 가야라는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여러분에게 설명드립니다. 요즘은 학자들마다 조금 추정하는 또는 비정하는 것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저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했습니다. 금관가야 이야기를 해보면, <삼국유사>를 보면 김해지역에 토착세력인 9 간이 모여서 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런데 산봉우리에 이상한 소리와 모습들이 보여서 쫓아가 보니까 산 정상에 여섯 개의 알들이 있다는 거죠. 여섯 개 알을 아홉 명의 추장이 에워싸고 노래를 부릅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이게 ‘구지가’라 그러죠. 그래서 구지가를 부르고 나니까 맨 먼저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을 김해지역에 있는 9 간이 임금으로 추대했는데, 그 임금이 바로 수로였고 금관가야의 시조였다. 지금 김해 김 씨 시조죠.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후의 각각의 다섯 개 알에서 태어난 사내 녀석을 각 지역에 보내서 6 가야 연맹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사료상으로 보시면 가락국은 AD 42년에 건국되었고, 곧 6개 가야 연맹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대가야 유물이죠. 왜 제가 이걸 보여드리냐면 여섯 개의 가야 연맹을 가야 연맹체라 그럽니다. 그런데 가야 연맹체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거든요. 전기는 김해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가 주도를 하고, 후기 가야 연맹은 경북 고령에 있는 대가야에서 주도를 합니다. 그래서 가야 연맹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전기는 금관가야, 후기는 대가야가 주도를 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금관가야에 건국설화는 아홉 명의 추장에 의해서 수로가 왕으로 추대된다고 그랬죠. 그런데 중국에 있는 <삼국지>, <위지 동위 전> 내용에 보시면 금관가야가 있었던 변·진 한국에는 총 24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기록이 돼있습니다. 24개의 소국 중에서 규모가 큰 것은 4~5천 가, 작은 것은 6~7백 가입니다. 구야국이 규모가 큰 나라거든요. 그러면 5천으로 잡아보면 5천이니까 5천 곱하기 1가당 5명이니까 2만 5천 명이 되죠. 그래서 2만 5천 명을 평균으로 잡고 대략 해보니까 아홉 개 집단으로 되어있으니까 평균 5백 가가 한 집단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2천5백 명이 한 집단이 되고 김해지역이 아홉 개의 집단이 있다, 그 아홉 개의 집단을 뭐라고 부르느냐? 금관가야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금관가야 규모는 대략 2만 5천 명 정도 인구를 가지고 있는 소국이었다 이렇게 우리가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런 가야의 모습에 있어서 변화상을 우리가 추정을 해봐야 하는데, 아까 여러분 지도에서 보셨죠? 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 사이에 껴있습니다.

한반도의 4세기

한반도가 4세기쯤 되면 고구려가 낙랑·대방을 소멸시키고 백제와 대결을 하거든요. 그리고 이때쯤 되면 370년경입니다. 백제는 지금의 목포, 전라남도 해안까지 진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주도권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가지려고 주도를 하려고 하는 이런 형국이 되겠죠. 이때 백제는 가야, 왜와 함께 새로운 교역 루트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반도의 동남쪽에 있는 신라가 외톨이가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신라로서는 생존을 해야 되고, 그러다 보니까 백제와 대결을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4세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4세기의 고구려가 남하하게 되고, 백제가 힘을 키우게 되고, 여기에 신라가 덩달아서 생존을 위해서 백제와 대결을 하게 되고, 한반도 남부는 아주 복잡한 형국이 되는 거죠. 바로 그 과정에서 금관가야가 소멸되어 버립니다. 즉, 맨 밑에 있는 것처럼 전기 가야 연명이 해체가 되어버리는 거죠.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디서 알 수 있느냐, 바로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습니다. 금관가야의 소멸 과정은 광개토 대왕의 비문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음에 다른 주제의 수업을 할 때 제가 설명을 드리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계신 사진은 이쪽이 지금 현재 낙동강 하구를 단순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금관가야가 있었던 시기에, 아까 제가 고(古) 김해만이라고 그랬죠. 고(古) 김해만은 아마 이런 형태였을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다음에 지금 삼각주는 있었지만 가야가 있었던 시기에, 지금으로부터 천 7백 년 전이죠. 천 7백 년 전에는 이런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유추를 하십니까?”라고 여러분들이 반문을 하실 건데, 이런 흔적들은 지금 현재 많이 남아있습니다.

김해지역

지금 현재 김해지역에 가보시면, 김해지역의 김해시청 쪽입니다. 산 절개지를 보면, 절개지라기보다는 산 쪽을 보면 해식동굴이 있습니다. 파도에 의해서 동굴이 만들어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흔적이 있고 또 지금 김해 평야지역에 출토되는 유물들 또는 패총들 분포 지를 보면, 이쪽 해안선 안쪽으로 많이 나와있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의 이런 모습은 1910년대에 일본이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 매립을 한 곳이거든요. 상당 부분을. 그런 측면을 제외하고 본다면 아마 가야 시대는 낙동강 하구가 이랬을 것이다. 여러분 사진으로 보시다시피 아주 항만 모습이죠. 항만 모습이고, 낙동강 상류, 여기는 바로 남해,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저것을 고(古) 김해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고(古) 김해만은 강과 바다가 교차를 하죠. 그러다 보니까 어류자원이 아주 풍부하게 되고, 앞서 제가 세 번째 주제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류가 정착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죠. 특히 낙동강 하구에 있는 고(古) 김해만은 수심이 5미터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담수, 민물과 바닷물이 모이는, 교차하는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플러스. 뭐가 있느냐? 바로 여기 나와있죠. 우수한 철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철이 생산되었다고 하는 근거가 뭐냐, 그것은 바로 중국에 있는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여 한(漢), 예(濊), 왜(倭) 모두가 철을 얻어간다.’‘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철을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전(錢), 동전입니다. 동전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철을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한다.’ 중국의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이 한나라가 되겠죠. 낙동강 하구의 금관가야에 와서 철을 구입해 갔다고 하는 이런 내용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한나라 그리고 왜, 일본이죠. 여기까지 철을 얻어 간다 즉, 아주 우수한 철을 생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철을 생산해서 어떻게 수출하느냐, 앞서 여러분들이 보셨죠. 바로 고(古) 김해만이라고 하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이용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지금 이것은 도산 김정호 선생이 그렸던 대동여지도의 낙동강 하구의 일부입니다. 여기 보시면 지금 낙동강 하구 모습하고 다르죠. 칠 점(七占)이라고 하는 섬도 있고, 명지(明旨)라고 하는 삼각주도 있고. 그러니까 이것은 1800년대 초쯤의 모습이거든요. 그러니까 아까 고(古) 김해만이 점점 퇴적물에 의해서 쌓이고, 쌓이고 해서 이렇게 되고, 지금의 모습으로 갔다는 점.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고(古) 김해만은 옛날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고(古) 김해만을 통해서 금관가야가 어떻게 성장했느냐, 이것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금관가야의 성장

낙동강 하구의 풍부한 물자가 생산되고 있고 또 항만이라 교통의 거점이었고, 그러다 보니까 새로운 문화가 창출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겁니다. 문화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있지만 외부로부터의 충격 내지는 외부로부터 어떤 요인들이 들어옴으로 해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거든요. 바로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고(古) 김해만이 매우 중요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역의 핵심이 뭐냐, 바로 철이 되죠. 철. 그래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섯 개의 가야였습니다. 이런 가야가 금관가야의 철 생산에 의해서 교역, 또는 교역의 이윤을, 또는 교역을 통해서 들어온 새로운 문화를 재분배받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거죠. 즉, 다시 말씀드리면 금강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금관가야가 철 교역을 통해서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여서 내륙에 있는 다섯 개의 가야에 분배를 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금관가야는 처음부터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해서 해상왕국으로서 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까 여러분에게 설명드렸습니다. 중국의 한나라까지도 철을 수출하고, 일본까지도 철을 수출한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나머지 다섯 개의 가야보다도 더 수준 높은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고 또, 해상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는 다른 가야보다 차별화되고 우수한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또 고(古) 김해만이라고 하는 지리적 이점을 통해서 대외교역을 활발하게 추진하면서 우수한 기술들을 확보를 했을 겁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도 문화적으로 기술적으로도 비교 우위에 접해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이야기는 뭐냐면, 내륙에 있는 다섯 개 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 비화가야 그리고 소가야는 발전하기 위해서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금관가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들은 육지로 못 나가죠. 서쪽으로 가면 백제가 가로막아있고, 동부 쪽으로 가면 신라가 가로막아 있고, 그러다 보니까 금관가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형국이었다 이렇게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이쪽에 보시면 ‘망산도’라든지 ‘봉황대 유적지’ 이게 뭐냐면 바로 가야가 해상활동을 했던 중요한 근거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망산도는 김해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옵니다. 올 때 허황후가 안전하게 산외 별포에 정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에서 망산도라고 하는 바위입니다. 그 위에 올라가서 횃불을 들고 허황후가 어디로 와야 된다는 것을 밝혔다는 거죠. 그래서 이미 바닷가의 망산도의 섬에 올라가서 횃불을 밝혔다 정도로 해상 항해술이 뛰어났다는 점이고, 봉황대 유적은 가야 시대의 항만기술을 발굴을 통해서 복원한 겁니다.

가야의 역할

가야의 배를 이용해서 중국까지 대외교역을 주도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보면 낙동강 중상류에 있는 가야가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구에 있는 금관가야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수준 높은 고대문화를 적극 수용해서 내륙으로 전달해 주는 중요한 거점으로서 기능을 했다’근데 억압적이고 차별화된 것이냐, 아니라는 겁니다. 고(古) 김해만은 결국에 뭐냐면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상호 호혜적인 국제 교역체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금관가야가 나머지 다섯 개 가야를 위협하거나 군림하거나 그랬던 것이 아니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문화도 공유하고 기술도 공유하고 이렇게 했다는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금관가야의 우리가 문화적 수준을 이해를 해야 되는데, 여기 보시면 파사석탑. 이게 제가 여러 차례 답사를 해봤습니다만, 허황후릉 앞에 있는 겁니다. 허황후릉 앞에 있는데 <삼국유사>에 보면 허황후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아버지가 밤에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신인 신선이 나타나서 너희 딸을 동북 구천리에 있는 나라에 시집을 보내야 잘 산다 이렇게 충고를 하더란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허황후를 배에 태워서 동북 구천리에 있는 나라에 보냈는데 그다음 날 다시 돌아오더라는 겁니다. 왜 돌아왔느냐 물으니까 '배가 너무 출렁거려서 배가 안 나갑니다' 아버지한테 얘기하니까 아버지가 돌을 몇 덩어리를 실어주었다고 돼있거든요. 그 돌을 싣고 무사히 망산도를 거쳐서 금관가야에 들어갔다고 <삼국유사>에 기록이 돼있습니다. 그때 실었던 돌이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 글쎄요. 진짠지는 그거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제가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그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금관가야가 해상교역을 주도하고 또는 상당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것들은 아까 여러분들 보셨죠.

유적지

봉황대 유적이라든지 망산도 유적지라든지 또는 파사석탑 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통해 알 수 있고, 또 제가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 기록을 통해서 그 지역에 철이 생산된다 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해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금관가야의 성격과 의의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관가야는 철 생산을 통한 교역의 분배권을 장악한 개방적인 무역 중개 항구로 발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역과 분배를 통해 금관가야는 위계적인 권위를 확립한 관문 사회라는 거죠. 관문 사회, 개방된 사회라는 겁니다. 폐쇄적으로 운영하거나 특정한 누군가가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활용할 수 있고 또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맨 밑에 적어놓은 것처럼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상호 호혜적인 국제 교역체계를 성립하고 또 발전시켰다는 겁니다. 그 핵심이 뭐냐? 그 핵심이 바로 낙동강 하구의 고(古) 김해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네 번째 주제의 강의를 종합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