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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부산 역사의 개요

전근대 부산 역사의 개요

전근대 부산 역사의 개요
전근대 부산 역사의 개요

전근대 부산 역사의 개요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근대 부산 역사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석기시대 그리고 고대사 위주로 설명을 드릴 건데, 먼저 전체적으로 고려 시대까지 개간을 먼저 하고 2주제, 3주제, 4주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보고 계시는 화면에 이쪽은 해운대구 좌동, 중동 유적지입니다. 이 유적지는 한국 구석기시대 유적지입니다. 지금은 해운대 신시가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가지고 현재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청사포 유적지입니다. 청사포 유적지는 지금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동해남부선 폐선 철도 옆에 있던 구석기 유적지입니다. 이 두 군데 유적지를 통해서 부산의 구석기시대의 흐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두 유적지를 통해서 부산의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다. 여기서 살고 있었다는 개념은 정착의 단계가 아니고 구석기 시대의 특징인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중동지역에 잠시 머물다가 또는 청사포 지역에 잠시 머물던 구석기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구석기 시대의 위인 신석기시대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보셨던 구석기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1만 년 훨씬 이전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 편년에 있어서 신석기 유적은 대체적으로 지금으로부터 기원전 6천 년 정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신석기

부산에 있는 신석기 유적지의 특징들이 조금 나타나는데, 주로 신석기시대의 유적지의 분포가 해안가 또는 낙동강 주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다시피 영도 동산동 그리고 아치섬, 영선동, 서구 다대동, 암남동, 그리고 강서구 북정, 죽곡, 금곡동 이런 해안가나 강가를 중심으로 해서 많이 분포해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부산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있다는 이야기는 곧 인류가 정착을 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신석기시대의 경제행위는 구석기시대와는 조금 다릅니다. 구석기시대는 무리를 지어서 수렵, 어로, 채집 경제생활을 하는데 비해서, 신석기시대는 농경을 시작합니다. 물론 신석기 처음부터 지금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완벽한 농경은 하지 못합니다. 아주 초보적인 농경을 시작하면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차이점은 정착이냐 이동이냐,구석기시대에는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이유가 수렵, 어로, 채집, 경제생활을 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는 것이고, 신석기시대에는 초보적이지만 농경을 하기 때문에 정착을 한다고 하는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 부산

다음은 여러분들하고 청동기시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생각보다 상당히 미흡합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만은 가장 큰 이유는 부산이 도시화되면서 청동기시대 유적지가 많이 파괴된 부분도 있고, 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부산에 많이 거주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기는 사실 힘든 실정이다. 청동기 시대를 가장 대표하는 유적이 바로 고인돌입니다. 하지만 부산지역에는 고인돌 유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산의 청동기 시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유추해볼 수 없는 실정입니다. 다만 부산의 청동기 유적지가 일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보았을 때는 일정 규모 이상의 집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부산

신라시대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라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 부산, 실질적으로 여러분 잘 아시죠. 신라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수도는 지금의 경주입니다. 지금의 경주에서 부산까지는 지금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옛날은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먼 거리일 수도 있습니다만, 부산이 경주와 가깝지만 신라시대에 주목받을 만한 지역은 아니었다. 왜 이러냐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삼국사기라든지 또는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초기 기록들을 찾아보면 부산과 관련된 기록들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부산은 중앙정부로부터 특별히 주목받지 못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범어사 창건설화를 통해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부산 금정구에 있는 범어사는 신라시대 특히 통일신라 전후로 해서 창건된 걸로 나와있습니다. 나와있는데 범어사의 창건설화는 왜구의 침구를 막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설치했다고 하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부산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인 측면. 즉, 일본과 가깝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본으로부터의 해적, 왜구라고 그러죠, 우리가. 해적이 많이 부산 인근에 출몰을 많이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신라 정부에서는 그런 일본에서 오는 해적을 막기 위해서 범어사라고 하는 절을 창건해서 이것을 막고자 하는 이런 의도가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부산의 구체적인 모습은 그려볼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범어사 창건설화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혹은 제가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죠? 통일신라시대 후대에 가면 후삼국시대라고하는 시대가 만들어지죠. 지금 여러분들이 화면에서 보시다시피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이렇게 세 나라로 정립이 되어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후고구려는 궁예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이고, 후백제는 견훤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입니다. 신라는 기존에 후백제, 백제 영역까지 다 아우르고 있었습니다만, 궁예, 견훤에 의해서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축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부산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후삼국시대에 부산지역이 중요한 이야기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조금 정리를 했는데, 먼저 여러분 호족이라고 하십니까? 호족. 후삼국시대에 오면 각 지역을 거점으로 해서 지역의 촌주라든지, 성주라든지 또는 해상세력이라든지 또는 유망민들이 중심이 되어서 그 특정지역을 지배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호족이라고 하는데, 부산지역의 후삼국시대의 호족을 제가 찾아보니까 지금 나와있는 것처럼 김해지역에는 소율희, 소충좌. 소율희, 소충좌는 김율희, 김충좌라고도 합니다만, 아무튼 사료에서는 소율희, 소충좌로 되어있습니다. 그다음에 지금의 양산에는 김인훈이라는 호족이 있었던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다음에 부산과 가까운 울산에는 박윤웅이라고 하는 호족이 있었습니다. 이런 호족들은 부산 인근 지역을 지배하는 호족들이죠. 그런데 특이한 점은 부산을 주도하는 또는 부산을 대표하는 호족이 없습니다. 없었던 것인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것인지 확인을 할 수 없습니다만,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부산에는 주목되는 호족이 없었다. 그런데 삼국사기라든지 또는 고려사 기록을 보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 맨 밑에 나와있죠.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 왕건에게 절영마를 주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절영마. 절영마는 절영의 말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잘 아시죠? 부산의 영도라고 하는 섬이 있습니다. 영도라는 섬엔 옛날부터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죠. 그래서 영도에서 키운 말들이 너무 잘 달려서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절영마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런 절영마를 왕건에게 주었다. 그렇다면 부산지역에는 후백제의 견훤과 연관이 되는 호족이 또는 후백제 견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정설은 아닙니다만은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그래서 후삼국시대 부산은 그다지 큰 세력이 있었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드리면 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후삼국시대 부산은 활발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정리를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이제 후삼국시대의 위상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후삼국시대 앞서 말씀드렸죠. 부산지역에는 그다지 부산을 주도하거나 또는 후삼국의 주역들인 궁예, 견훤, 신라에 연관되는 세력이라든지 이런 것들의 구체적인 물증이 없어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가면 부산은 양상이 조금 달라집니다. 그래서 먼저 고려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시대의 부산

고려시대의 부산, 지금 앞서 여러분들이 아까 보셨던 부산의 고려시대 지도인데 지도상에 고려시대의 지방구현 체제 내에서도 부산이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동래군이라고 하는 것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제가 고려시대 부산의 모습과 관련해서 사료를 찾아봤는데, 그다지 두드러진 내용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의할 만한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엔 고려시대에도 부산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일(對日) 일본과의 교류와 관련되는 이야기에 있어서는 부산의 이야기가 조금씩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동래를 지나갔다고 하는 이야기들도 있고, 또 고려사 기록에 보면 고려후기에 왜구 침구에 대한, 왜구가 약탈을 많이 하죠. 주로 부산지역을 많이 약탈을 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 부산이 가깝죠. 그러다 보니까 일본의 왜구들이 가장 가까운 부산에 자주 출몰을 해서 부산지역에 있는 민가를 방화하고, 부산민들이 가지고 있는 식량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사 기록에 보면 부산지역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아주 많은 또는 집중적으로 약탈을 당했던 그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근대 부산의 역사 개요 즉, 다시 말씀드리면 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야기를 정리해 드렸습니다.